와타누키 다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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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타누키 다미스케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 중의원 의장, 국민신당 대표 등을 역임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가네보 방적, 토나미 운수를 거쳐 28세에 토나미 운수 대표이사가 되어 기업을 성장시켰다. 1969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국토청 장관, 건설상, 자민당 간사장 등을 지냈으며, 우정 민영화에 반대하여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2009년 총선에서 낙선한 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2016년 자민당에 복당했다.
와타누키 다미스케는 도야마현 히가시토나미군 이나미정(지금의 난토시)에서 태어났다. 와타누키가는 대대로 이나미하치만궁의 궁사를 맡아왔는데, 와타누키 다미스케는 15대에 해당했다. 구제 도나미 중학교(현 도야마현립 도나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후지와라 공업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예과 재학 중 후지와라 공업대학이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흡수합병되었는데, 와타누키가 소속되어 있던 야금과가 폐지되면서 경제학부에 소속되었다.
2. 생애
졸업 후 가네보 방적(후의 가네보)에서 일했다. 1955년 28세의 나이로 도나미 운수(현 토나미 운수)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경영 파탄 직전의 도나미 운수를 재건해 상장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사업 수완을 보였다.
1955년 도야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4년 뒤인 1959년에 재도전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재선에 성공하여 현의회 의원을 지내다가, 1967년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년 뒤 총선에 다시 출마하여 도야마현 제2구에서 당선되었다.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중의원 의원이 되었으며, 가와시마 쇼지로가 이끌던 교우 클럽에 가입했다. 1973년에는 청람회 결성에 참가했지만, 회합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고 탈퇴했다. 교우 클럽이 해산된 후에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끄는 목요 클럽에 가입했다.
1986년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 제3차 나카소네 내각이 출범하자 국토청 장관 겸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으로 임명되어 처음 입각했다. 1990년 제2차 가이후 내각에서는 건설상으로 두 번째 입각했다. 1991년 미야자와 내각에서는 자유민주당 간사장이 되었는데, 파벌을 옮긴 경력이 있고 총재 후보급으로 보기 힘든 와타누키를 간사장에 기용한 것은 예상 밖의 인사라는 평가가 많았다.[27] 당시 와타누키는 목요 클럽을 계승한 다케시타 노보루의 경세회 소속이었는데, 경세회는 내부 갈등이 심했다.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간사장이 되기를 원했으나 오자와 이치로가 견제하여 와타누키가 간사장이 되었다.[28] 이 갈등은 경세회 분열로 이어졌고, 와타누키는 다케시타, 오부치 게이조, 하타 쓰토무, 오자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한동안 무파벌로 지냈다. 이후 하타파가 자민당을 탈당하자 오부치파에 가입했다.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첫 선거인 1996년 총선에서는 182,185표를 얻어 전국 최다 득표수를 기록했다. 1998년 오부치가 총리대신이 되자 와타누키는 파벌 회장이 되었다.
2000년 일본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일본의 우정민영화를 추진하자, 자민당 우정족 의원 약 200명이 참여한 우정사업간담회 회장을 맡아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2005년 우정민영화 법안이 중의원에 상정되자 반대표를 던졌지만 통과되었다.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고이즈미는 중의원을 해산했고, 우정민영화 법안에 반대한 의원들에게 공천을 주지 않았다. 와타누키는 이에 반발하여 자민당을 탈당하고 가메이 시즈카, 가메이 히사오키 등 우정민영화 반대 의원 5명과 함께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대표가 되었다. 자민당은 와타누키의 탈당을 반려하고 제명 처분했다. 총선에서 자민당 공천을 받은 하기야마 교곤을 꺾고 13선에 성공했다.
총선 후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퇴장할 때 기자에게 누구에게 투표했냐는 질문을 받자 "... 와타누키. 에헷!"이라고 답했다.[1]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당선된 의원들을 모아 통일 회파를 결성하려 했으나 노로타 호세이 전 방위청 장관만 참여했다.[1]
2007년 7월 참의원 의원 선거 때 무소속 모리타 다카시를 지원했다.[1] 모리타는 당선된 후 그해 12월에 국민신당에 입당했다.[1]
2009년 총선 때 자민당 가와이 쓰네노리가 와타누키를 지지하기 위해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에 입당하겠다고 발표했다. 와타누키가 지역구에 출마하지 않고 비례대표 단독 출마를 결정해 가와이의 탈당은 무산되었지만, 자민당 내에서 논란이 되었다. 와타누키는 총선에서 낙선했고 당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최고고문이 되었다. 도야마현 제1구에 출마한 민주당 무라이 무네아키를 지지해 당선에 기여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역구였던 도야마현 제3구를 다른 정치 신인에게 물려주지 않고 야당계 무소속 아이모토 요시히코도 지지하지 않아, 자민당 공천을 받은 전 다카오카시장 다치바나 게이이치로가 당선되는데 기여했다.
2010년 4월 29일 동화대수장을 수훈받았다. 2011년 4월 명예 난토시민 칭호를 받았다.[31]
와타누키의 뒤를 이어 국민신당 대표가 되었던 가메이 시즈카가 2012년 4월 소비세 증세에 반대하며 민국 연립 정권에서 이탈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금융상 지미 쇼자부로와 시모지 미키오 등이 반발하면서 국민신당은 분열했다. 가메이는 대표에서 해임되자 가메이 아키코와 함께 국민신당을 탈당했다. 이때 국민신당 공식 홈페이지에서 와타누키의 이름이 삭제됐다.
국민신당이 2013년 해산한 뒤, 와타누키는 자민당 복당을 원치 않았지만 자민당 간사장 니카이 도시히로가 복당을 권했다.[32] 2016년 11월 2일 자민당 당기위원회가 와타누키의 복당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2. 1. 정계 입문 전
도야마현 히가시토나미군 이나미정(지금의 난토시)에서 태어났다. 와타누키가는 대대로 이나미하치만궁의 궁사를 맡아왔는데 와타누키 다미스케는 15대에 해당했다. 구제 도나미 중학교(현 도야마현립 도나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후지와라 공업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예과 재학 중일 때 후지와라 공업대학이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흡수합병되었는데 와타누키가 소속되어 있던 야금과가 폐지되면서 경제학부에 소속되었다.
졸업 후 가네보 방적(후의 가네보)에서 일했다. 1955년 28살의 나이로 도나미 운수(현 토나미 운수)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경영 파탄 직전의 도나미 운수를 재건해 상장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사업 수완을 보였다.
2. 2. 정계 입문과 자민당 의원
1955년 도야마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4년 뒤인 1959년에 재도전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재선에 성공하여 현의회 의원을 지내다가, 1967년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년 뒤 총선에 다시 출마하여 도야마현 제2구에서 당선되었다.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중의원 의원이 되었으며, 가와시마 쇼지로가 이끌던 교우 클럽에 가입했다. 1973년에는 청람회 결성에 참가했지만, 회합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고 탈퇴했다. 교우 클럽이 해산된 후에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끄는 목요 클럽에 가입했다.1986년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 제3차 나카소네 내각이 출범하자 국토청 장관 겸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으로 임명되어 처음 입각했다. 1990년 제2차 가이후 내각에서는 건설상으로 두 번째 입각했다. 1991년 미야자와 내각에서는 자유민주당 간사장이 되었는데, 파벌을 옮긴 경력이 있고 총재 후보급으로 보기 힘든 와타누키를 간사장에 기용한 것은 예상 밖의 인사라는 평가가 많았다.[27] 당시 와타누키는 목요 클럽을 계승한 다케시타 노보루의 경세회 소속이었는데, 경세회는 내부 갈등이 심했다.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간사장이 되기를 원했으나 오자와 이치로가 견제하여 와타누키가 간사장이 되었다.[28] 이 갈등은 경세회 분열로 이어졌고, 와타누키는 다케시타, 오부치 게이조, 하타 쓰토무, 오자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한동안 무파벌로 지냈다. 이후 하타파가 자민당을 탈당하자 오부치파에 가입했다.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첫 선거인 1996년 총선에서는 182,185표를 얻어 전국 최다 득표수를 기록했다. 1998년 오부치가 총리대신이 되자 와타누키는 파벌 회장이 되었다.
2000년 일본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2002년 12월 10일에는 의사진행 원고를 실수로 두 장 넘겨 2000년도 결산 채결이 처리되지 않았는데도 산회 선언을 했다가, 이틀 뒤 산회 선언을 무효로 하고 결산 채결을 진행했다. 2003년 볼로냐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4년에는 신사본청으로부터 신토에 공적이 있는 신직(神職)에게 주어지는 장로 칭호를 받았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일본의 우정민영화를 추진하자, 와타누키는 자민당 우정족 의원 약 200명이 참여한 우정사업간담회 회장을 맡아 우정민영화에 강하게 반대했다. 2005년 우정민영화 법안이 중의원에 상정되자 반대표를 던졌지만 통과되었다.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고이즈미는 중의원을 해산했고, 우정민영화 법안에 반대한 의원들에게 공천을 주지 않았다. 와타누키는 이에 반발하여 자민당을 탈당하고 가메이 시즈카, 가메이 히사오키 등 우정민영화 반대 의원 5명과 함께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대표가 되었다. 자민당은 와타누키의 탈당을 반려하고 제명 처분했다. 총선에서 자민당 공천을 받은 하기야마 교곤을 꺾고 13선에 성공했다.
2. 3. 우정 민영화 반대와 국민신당 창당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 추진한 우정 민영화에 반대하여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했다.[1] 같은 해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도야마현 제3구에 국민신당 후보로 출마하여 13선에 성공했다.[1]총선 후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퇴장할 때 기자에게 누구에게 투표했냐는 질문을 받자 "... 와타누키. 에헷!"이라고 답했다.[1]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당선된 의원들을 모아 통일 회파를 결성하려 했으나 노로타 호세이 전 방위청 장관만 참여했다.[1]
2007년 7월 참의원 의원 선거 때 무소속 모리타 다카시를 지원했다.[1] 모리타는 당선된 후 그해 12월에 국민신당에 입당했다.[1]
2. 4. 국민신당 활동과 정계 은퇴
2005년 총선에서 우정민영화에 반대하여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했다.[26] 같은 해 총선에서 도야마현 제3구에 국민신당 후보로 출마하여 13선에 성공했다.총선 후 진행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퇴장할 때 기자에게 누구에게 투표했냐는 질문을 받자 "… 와타누키. 에헷!"이라고 답했다.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재선에 성공한 의원들을 규합해 통일 회파를 결성하고자 했지만, 전 방위청 장관 노로타 호세이만 참여했다.
2007년 참의원 선거 때 무소속 모리타 다카시를 지원했다. 모리타는 당선 후 12월에 국민신당에 입당했다.
2009년 총선 때 자민당 가와이 쓰네노리가 와타누키를 지지하기 위해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에 입당하겠다고 발표했다. 와타누키가 지역구에 출마하지 않고 비례대표 단독 출마를 결정해 가와이의 탈당은 무산되었지만, 자민당 내에서 논란이 되었다. 와타누키는 총선에서 낙선했고 당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최고고문이 되었다. 도야마현 제1구에 출마한 민주당 무라이 무네아키를 지지해 당선에 기여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역구였던 도야마현 제3구를 다른 정치 신인에게 물려주지 않고 야당계 무소속 아이모토 요시히코도 지지하지 않아, 자민당 공천을 받은 전 다카오카시장 다치바나 게이이치로가 당선되는데 기여했다. 와타누키가 아이모토를 지지하지 않은 이유는 지지자 중 일부가 무소속 시바타 다쿠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2010년 4월 29일 동화대수장을 수훈받았다. 5월 7일 수훈자를 대표해 "각자의 분야에서 더욱 정진할 것을 결의한다"라고 인사했고, 아키히토는 "오랜 기간 각자의 역할에 힘써 국가나 사회를 위해, 또 여러 사람들을 위해 노력해 온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라고 화답했다.[29][30] 2011년 4월 명예 난토시민 칭호를 받았다.[31]
와타누키의 뒤를 이어 국민신당 대표가 되었던 가메이 시즈카가 2012년 4월 소비세 증세에 반대하며 민국 연립 정권에서 이탈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금융상 지미 쇼자부로와 시모지 미키오 등이 반발하면서 국민신당은 분열했다. 가메이는 대표에서 해임되자 가메이 아키코와 함께 국민신당을 탈당했다. 이때 국민신당 공식 홈페이지에서 와타누키의 이름이 삭제됐다.
국민신당이 2013년 해산한 뒤, 와타누키는 자민당 복당을 원치 않았지만 자민당 간사장 니카이 도시히로가 복당을 권했다.[32] 2016년 11월 2일 자민당 당기위원회가 와타누키의 복당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자민당이 제명된 의원의 복당을 허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당기위원회는 복당 심사에 앞서 제명된 국회의원의 복당 기준을 마련해야 했다.[33][34]
3. 사상 및 정책
니노미야 소토쿠(니노미야 긴지로)가 제창한 보덕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후쿠다 아키오 등이 결성한 “니노미야 소토쿠 사상 연구회”에도 참가했다.[18] 보덕니노미야 신사의 자선 그림마 전시회에도 찬동하여, 직접 휘호한 그림마를 출품했다.[19]
- 외국인 참정권(外国人参政権)에 반대.
- 국적법(国籍法) 개정에 반대.
4. 역대 선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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